주사위, 판정법 그리고 특기표 TRPG

오늘은 모험기획국의 사이코로픽션에서 사용하는 특기표의 개념을 가지고 판정법의 변화에 대한 이야기를 좀 해 볼까 합니다.


주사위

태초에 D&D에서 주사위를 사용한 이래 TRPG에서 주사위는 판정의 알파이자 오메가였습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이러한 주사위의 한계점으로 인해서 주사위를 대체하고자 하는 시도가 여럿 있었죠. 하지만 주사위는 그 편리성이라던가 접근성에 있어서 다른 판정법에 비해 압도적인 이점을 가지고 있고, 그 때문에 주사위를 사용하는 판정 방식은 TRPG의 대세로서 굳어져 있습니다. 일단 주사위가 아니라 다른 방식의 진행이나 개념이 도입되면 나오는 평가가 '보드게임같고~' 라는 평가인걸 생각해 보면 일반적인 개념 하에서 주사위가 아닌 다른것을 (많이)사용한다 = TRPG가 아닌 보드게임에 가까워짐 이라고 하는 인식을 많이들 가지고 계신 것 같습니다.

이러한 역사(?)와 발전의 흐름 아래에서 '판정법'을 말할때는 주사위를 굴려서 그것의 성공과 실패를 확인한다는 개념으로 성공과 실패를 어떻게 가르냐. 와 같은 부분이 '판정법'의 주요 내용이 되었습니다만, 이 다양한 판정법들이 정말로 '다양한가' 에 대한 부분은 의문의 여지가 있습니다.


High/Low
거의 모든 판정법은 주사위를 굴려 나온 값이 목표치 이상인가 아니면 이하인가를 판정하는 방식으로 성공과 실패를 판단합니다. 이러한 방식은 개인의 (능력치와 같은)고정되어 있는 값을 통해 목표치의 변동을 구하고 이에 따라 성공 확률이 변동됩니다. 가장 간단한 방식이지만 능력치의 영향을 많이 받고 난수의 분포가 크게 발생하는 단점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타난 것이 다양한 종류의 다면체를 이용해서 발생되는 난수의 범위를 바꾼다던지, 다면체를 여러개 굴려 그 합을 더해서 난수의 발생 범위를 집중시키는 등의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방법은 성공 확률을 변화 시켜서 안정적인 판정이나 세계에 다양성을 추가 해 줄 수는 있어도 기본적으로 목표값 이상/이하를 판정하는 판정법 자체를 바꾸지는 못 했습니다.

목표치와 굴림을 통한 그 '순간'에의 성공/실패인것이죠. 성공과 실패만이 존재하는 일종의 '0차원' 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Time
이쯤에서 한번 집고 넘어가야 할 것이 다이스 풀 시스템입니다. 다이스 풀 이라고 불리는 능력치에 따라 굴리는 주사위의 갯수가 변하는 시스템은 얼핏 보면 이 시스템은 단순히 목표치를 달성하느냐 실패하느냐의 위와 같은 시스템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한번의 판정을 여러번 실행 한다는 점에서 약간 다릅니다. 각각의 주사위의 판정은 동시에 이루어 지는 것 같이 보이지만 실제로는 각각의 주사위는 다른 주사위의 굴림에 영향을 주지 못하고, 각각으로 작용되는 판정의 연속인 것이죠. (굴려야 되는 주사위 보다 가진 주사위가 적을 경우 나눠서 여러번 굴리는 것을 생각하시면 편합니다)

이러한 판정 방식은 다이스풀 방식이 아닌 시스템에서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일정 시간 동안 여러번의 판정을 통하여 몇번이나 성공했나를 판정하는 방식과 매우 유사합니다. 게임 시간 내에서 일정 시간마다 시도 하던 것을 순간적으로 실행 한다는 점을 제외하면말이죠. 이에 따라 판정법에 시간의 개념을 추가해 봅시다. 시공간에서는 마지막에 추가될 t가 추가되었군요.


1차원
그리고 건도그를 봅시다. 건도그의 판정법은 한번의 굴림으로 성공 실패를 판정하면서 함께 얼마나 성공했나를 판정 할 수 있습니다. 얼핏 보면 간단하지만 이렇게 보면 어떨까요. 성공과 실패만이 존재하는 판정에선 한번의 판정으로 발생 할 수 있는 경우는 성공과 실패 두가지 조건만이 존재하게 됩니다. 하지만 여기서 건도그의 판정법, 즉 AB와 A+B를 모두 계산하는 판정법은 두가지의 조건이 결합된다고 볼 수 있죠. 기존의 판정법이 Go와 Not Go를 판정했다면 얼마나 Go를 했는지를 보여줍니다. 1차원의 등장입니다.

스타워즈 Edge of Empire를 볼 수도 있겠네요. 내러티브 다이스 시스템이라고 이름붙여진 이 주사위 시스템은 여러 종류의 주사위를 굴려서 그 값을 통한 판정의 성공/실패 여부에 더해서 이후의 이야기 전개에 대한 좋음/나쁨을 결정 할 수 있습니다. 설득을 통해서 문을 열게 했지만 경비의 불만이 쌓였다던가, 강력한 힘을 발휘했지만 다크포스에 마음이 빠지게 된다던가. 일반적으로는 플레이어의 선택에 따른 목표치의 증감을 위한 내러티브적 플러스/마이너스 요소를 주사위 굴림에 추가하였습니다. 이야기적인 방향성은 다양하게 분화 할 수 있겠지만, 판정에서 구현하는 것을 목표의 성공/실패와 이후 전개의 좋음/나쁨으로 구분한다면, 1차원적인 판정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위의 건도그와는 다른 방식의 분화지만요.


6면체
특기표 이야기를 하기 전에 잠시 일본의 TRPG 이야기를 해 볼까요. 일본은 다면체를 사용 하는 대신에 6면체를 가지고 이러저러한 다양한 시도를 했습니다. 소드월드의 레이팅표가 대표적인데, 주사위의 굴림이 바로 나온 값이 되는 것이 아니라 레이팅표를 한번 거쳐서 최종적인 값이 도출되는 방법이죠. 수학적으로 본다면 함수일까요? 이러한 방법은 6면체를 가지고도 좀 더 '현실적인' 판정을 할 수 있게 만들어 줬지만, 직관적이지 못하고 복잡해지는 단점을 낳았습니다.

비슷하긴 하지만 엔드브레이커와 같은 수치 외적인 시도도 있었습니다. 레이팅표와 같이 한번 거치기 때문에 복잡하지만, 복잡함 자체가 하나의 시스템이 되는 방식의 판정법이죠. 앞선 판정이 후의 판정에 영향을 주기도 하고, 다이스 풀 시스템도 약간 들어가 있는 복합적인 판정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6면체를 통한 다양한 시도 중 하나가 모험기획국의 시스템에서 사용하고 있는 2차원 판정인 특기표입니다.


특기표
물론 특기표 시스템은 판정 자체는 위에서 사용한 개념인 시간의 개념이나 동시에 여러 판정을 하는 방식으로 2차원을 구현하지는 않았습니다. 실제로 한번의 판정에서 나오는것은 단순한 성공/실패 두가지 뿐입니다. 하지만 이 특기표 시스템을 2차원적인 판정 시스템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말 그대로 단순히 판정을 2차원 평면 위에서 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주사위를 사용 하는 이상 특기표의 판정 방식 자체도 주사위 값의 High/Low를 통해 하게 됩니다만, 수치를 제외하고 개념적으로 이해하면 자신이 가지고 있는 특기와 목표하는 특기의 거리를 닿았느냐 못 닿았느냐 라는 방식의 거리를 재는 방식이란 것을 이해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수치의 계산은 2차원적인 평면 위에서의 '거리'를 플레이어들이 직관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컨버젼 해 수치화 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차원적인 개념을 플레이어가 1차원으로 이해하기 쉽게 풀이한 것이라고 할까요. 어찌 보면 2차원을 1차원 매체인 주사위를 통해 계량하기 위한 의도적인 컨버젼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2차원 평면과 벡터축이랄까요. 음.. 이쯤 되면 무슨 말인지 저도 잘 모르겠네요.


수치가 아닌 판정
어쨌거나 이러한 2차원 판정의 의의는 단순히 직관적이다, 같은 의미가 아니라 능력 자체를 2차원적으로 펼쳐 놓을 수 있다는 점에 있다고 봅니다. 계량된 수치로 나타나는 능력은 높고 낮음을 보기에는 편리하지만 능력간의 연관이나 비교를 정확히 하기 어렵습니다. 복합판정이나 보너스/패널티를 통해 연관성을 만들 수는 있지만 그것을 판단하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2차원 판정은 단순히 특기가 어디에 위치해 있고 근처에 어떤 특기가 있고 특기간의 거리를 보는것 만으로 특기간의 연관성을 파악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숫자로 상하관계나 높낮이가 명확하지 않은 것의 장점은 캐릭터간의 능력의 차이에 따른 패널티가 없는 수평적 관계나 이야기를 만들때 전투적인 특기에 특기가 집중되는 것을 막아주는 이점도 포함합니다. 능력에 붙어 있는 수치적인 차이에 집중하기 보다는 개별 특기가 가지는 이야기적 요소에 관심을 가질 수 있게 만드는 것이죠. 서양 RPG에서 판정을 줄여 이야기를 만든다 라는 개념과 반대로 판정 자체에 이야기를 넣는다. 라는 관점에서의 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수치와 이야기
이러한 판정법의 역사는 게임을 얼마나 현실적으로 만들 것이냐, 혹은 판정에의 집중이 아닌 이야기에 집중하게 만들것이냐 라고 하는 TRPG 화두의 역사와도 어느정도 닿아 있습니다. 다양한 주사위를 쓸 수 있던 혹은 주사위의 다양성에 집중하던 서양 RPG가 주사위를 굴리지 않는 방향으로 나아가거나 주사위를 더 다양하게 굴리는 길로 나아가는것과 6면체만 사용할 수 있던 일본 RPG가 주사위로 할 수 있는 것에 주목하는 양상을 보면 상당히 재미있다고 생각됩니다. 최근 몇년간 다양하게 영어로 번역되고 있는 일본 룰들을 생각하면 또 어떤 영향을 줄 수 있을지 궁금하기도 하구요.

여기서 다루지 못한 판정법에 대해서 알려 주시면 저에게도 영향을 주실 수 있을거 같군요.
자 그럼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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